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친원파 구세력과 친명파 신세력의 대립 === 고려 말 권문세족 집단은 원의 간섭기에 세력이 확장된 세력으로 [[공민왕]]의 숙청과 반원정책 이후로도 여전히 세력이 강성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중앙 정계의 기득권으로서 여전히 영향력이 살아있었고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와 같은 친명 신흥세력과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된 요동-만주의 복잡한 상황과 명 태조의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코케 테무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명군을 격파하며 버티는 [[북원]]의 저력은 고려 지배층으로 하여금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인임]]을 비롯한 기존 세력은 북원과의 관계를 중시했고, [[최영]]은 위에서의 명나라와의 마찰이나 성향과 친분 교류상 이인임과 같이 친원 정책에 찬성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의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이성계]]는 한반도 동북 지방 뿐 아니라 멀게는 간도-연해주 일대의 여진족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며 북원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성계의 기반의 존립이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이 지역의 여진족 등을 통해 동북방 지역의 정세를 정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코케테무르가 죽으면 미래가 없는 북원이 불리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1388년은 남옥이 '''15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북원의 숨통을 끊는 원정을 하던 상황이었다. 고려의 제2차 요동정벌도 이러한 외교적•정치적 상황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더 진군하지 않고 머문 것은 기상 문제와 보급 문제도 있겠지만 남옥의 원정 결과를 확인하고 움직이기 위한 것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